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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매일 큐티

말씀 QT_가르치고 고치고 전파하신 예수님
2021-01-21

마태복음 9장 27-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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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치유함을 받는 믿음


온전한 믿음이 있을 때 치유가 일어난다. 두 맹인이 예수님을 향하여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고백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로마서 말씀(롬10:17)대로 그들은 들음을 통하여 고침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두 맹인은 예수님께 고침을 구하지 아니하고 ‘불쌍히 여기실 것’을 구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두 맹인을 향하여 물으신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이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믿느냐’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튜에테’의 위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어의 순서를 보면 믿느냐에 해당하는 피스튜에테가 가장 서두에 자리를 잡는다. 따라서 이 구절에 대한 바른 순서는, “네가 믿느냐? 내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음을?”이 된다. 이를 통해 마태가 이 사건을 기록하며 독자에게 알리고자 했던 중심 내용이 단순히 치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치유 받는 자들의 ‘믿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들의 믿음대로 두 맹인은 눈을 뜨게 되었다. 예수님은 엄중하게 그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침묵할 것을 경고하셨다. 그러나 31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그들은 온 동네방네에 소문을 내며 사건을 알렸다.


예수님께서 침묵하기를 원하셨던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된 메시아관이 서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십자가 사역을 통하여 구원자로 오신 메시아가 자칫 잘못하다가는 인간적인 욕구와 욕망을 채우는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그들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늘 나에게도 불가능함 가운데 치유를 일으키시는 주님을 향한 믿음이 온전히 존재하고 있는가?


긍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심


일꾼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있다. 마태복음 9장 35절 이하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삶을 살아가시며 이 땅에서 집중하셨던 3대 사역이 등장한다. 그 사역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는 삶을 사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사역에 임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다.


36절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에는 긍휼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본문에서 ‘긍휼’로 번역이 된 헬라어 ‘에스플랑크니스테’는 내장, 창자를 뜻하는 ‘스플랜’이라는 단어에서 파생이 되었다. 따라서 긍휼의 뜻을 가진 에스플랑크니스테는 내장이 뒤틀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동반한 감정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실 때 바로 이러한 마음으로 바라보시며 사역에 임하셨다는 뜻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은 단순히 감정에서 그치지 않은 데 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고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영육 간의 구원을 친히 행동으로 베풀어 주시고 채워 주셨다. 주님의 긍휼하심은 항상 행동으로 나타났다. 그의 긍휼히 여기심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제1순위로 필요한 도움이다.


이어 주님은 때가 가까움을 알리는 추수에 대해 말씀하신다. 추수할 때가 가까워 왔으니 일꾼을 보내어 추수에 동참하게 해달라는 간구를 하나님께 요청하도록 하셨다. 눈여겨 볼 점은 일꾼을 모집하는데 있어서 세상적 기준이나 자의적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능력이나 조건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 일꾼의 최우선 순위가 된다. 우리 스스로가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선택하심, 그리고 보내심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자발적인 결단에 의해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하심에 의해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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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 8시 말씀 QT가 현대인들이 성경을 쉽고 감동적으로 읽도록 제작한 오디오 성경 '드라마 바이블'과 함께 합니다.

    해당 본문 듣기를 클릭하면 본문 말씀을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성자 : 박길웅 강도사(삼일교회)
출처 : Next세대mini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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